영국 런던 한복판 할리 스트리트. 고급 의료단지로 유명한 이 거리를 따라 걷자, 고풍스러운 4층 건물이 나타났다. 29번지라고 적힌 목조 대문 옆엔 병원 안내판만 붙어 있었다. 이 건물이 7년 전만 해도 영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대포통장 공장'이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웠다.
2001년 이곳에 문을 연 회사 설립 대행업체 '포메이션 하우스'는 전 세계 45만 개가 넘는 유령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들은 통장을 무더기로 만들어 보이스피싱 조직 등에 팔았다. 가짜 명의로 범죄 자금을 주고받는 대포통장이었다. 이렇게 흘러간 돈이 총 3억 파운드(당시 약 4462억 원)에 이르는 정황이 2019년 드러났다. 대포통장을 검은돈의 혈관에 비유한다면, 이 건물은 그 피를 돌게 만든 심장이었던 셈이다.
현재는 이곳에서 검은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대포통장의 '몸통'인 유령 회사를 방치해선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자, 정부가 이를 정조준한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포메이션 하우스는 2021년 해산됐다.
반면 한국 정부는 통장을 하나씩 막는 데 머물러 있다. 그사이 유령 회사는 활개를 친다. 투자 사기로 전세금 4500만 원을 잃은 유종수(가명·80) 씨도, 보이스피싱으로 2억 2800만 원을 뜯기고 신용유의자가 된 송현숙 씨(71)도 모두 실체가 불분명한 회사의 대포통장에 당했다.
유령 회사를 신속히 단속할 권한이 있는지가 한국과 영국의 격차를 만들었다. 영국은 회사 관리 책임을 기업청 한 곳에 몰아주고, 유령 회사를 직권으로 폐쇄할 권한까지 줬다. 하지만 한국은 회사의 관리 기능이 법원과 국세청에 나뉘어 있다. 통장은 은행이 따로 맡는다. 책임이 여러 곳에 나뉘어 있으니 누구도 확실히 책임지지 않는다. 이를 틈타 이미 문 닫은 회사의 통장이 다시 범죄에 쓰이는 일까지 벌어진다.
전문가들은 세 갈래 해법을 제시한다. 첫째, 흩어진 단속 책임을 하나로 모아 유령 회사를 직접 제재하는 영국식 제도다. 둘째, 정보를 가진 모든 기관이 실시간으로 범죄 단서를 나누는 호주·싱가포르식 합동 대응이다. 셋째, 지금은 보이스피싱에만 적용되는 대포통장 동결 제도를 신종 사기와 마약 등으로 넓히고, 감시가 취약한 제2금융권과 가상계좌까지 아우르는 감시망을 세우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가짜 회사를 직접 폐쇄할 권한을 갖고 있다. 2023년 경제범죄·기업투명성법(ECCTA)이 시행되면서, 범죄가 의심되거나 허위 정보로 세운 회사를 발견하면 정부가 직권으로 등기를 지울 수 있게 됐다. 유죄 확정을 기다릴 것도 없이, 서류가 거짓이란 점만 드러나면 회사 문을 닫는다는 뜻이다. 당시 정부 대책을 진두지휘한 존 펜로즈 반부패 총괄 대표는 "범죄 조직이 영국의 사법 시스템을 통해 더러운 돈을 유통하는 걸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첫 작품이 '해머 헤드 작전'이었다. 영국 기업청이 국세청, 국가범죄청(NCA) 등 기관과 협력해 한국의 '비상주 사무실'과 비슷한 회사 설립 대행업체를 집중 점검했다. 허위 정보를 적어 냈거나 진짜 주인을 숨긴 회사를 솎아냈다. 이 작전을 통해 해산시킨 유령 회사가 2025년 한 해에만 1만 1500개에 이른다.
마틴 스웨인 영국 기업청 정보·수사기관 협력국장은 "ECCTA 통과는 1844년 회사 등록 제도가 생긴 이래 가장 중요한 개혁"이라며 "범죄 정황이 의심되면 여러 정부 기관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 대응 체계가 가동된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정반대다. 회사 통장이 범죄에 쓰인 게 확실해도 곧장 문을 닫을 수 없다. 유일한 길인 해산 명령도 검사의 청구와 법원의 판단을 거쳐야 해 적어도 몇 달이 걸린다.
이런 제도의 격차는 적발 실적으로도 드러난다. 디지털금융범죄대응연구소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적발된 대포통장 주인은 2024년 기준 영국이 332.8명, 한국은 290.1명이었다. 한국의 대포통장 범죄가 영국보다 덜해서가 아니라, 영국이 그만큼 더 잡아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차이는 권한이 쪼개진 데서 비롯한다. 한국은 회사의 설립 등기는 등기소, 사업자등록은 국세청이 맡고, 거래 정보는 은행과 금융정보분석원(FIU)에 흩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폐업한 회사가 통장을 계속 써도 알아채기 어렵다. 회사는 사라졌는데 통장만 살아 움직이는 '좀비 통장'이다.
실제로 국내 대포통장 조직이 세운 유령 회사 '대한퍼스트'가 그랬다. 2023년 10월 국세청에서 폐업 처리된 뒤에도 통장이 석 달 가까이 도박 사이트와 보이스피싱, 투자 사기에 동원됐다. 한국에는 문 닫은 회사 통장이 범죄에 쓰여도 막을 권한을 가진 기관이 없다.
국세청은 "폐업해도 청산 절차 등이 남아 있어 통장을 함부로 막기 어렵다. 통장을 막을 권한이 있지도 않다"고 말했다. 회사 등기 사무를 총괄 지원하는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설립 단계에서 실제 운영 목적 등을 심사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관계기관과 연계해 의심 회사를 조기 식별하는 등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영국은 다르다. 원래 회사 설립 절차 담당이던 기업청에 2023년부터 유령 회사 감독·해산 권한까지 몰아줬다. 그 덕분에 유령 회사의 통장은 신속하게 정지된다. 자금 세탁 방지 분야 권위자인 니컬러스 라이더 영국 카디프대 법학·정치학부 교수는 대한퍼스트 사례를 두고 "영국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라고 했다. 그는 "영국이었다면 기업청이 강력한 유령 회사 감독 권한을 쥐고 빠르게 정보를 공유해 신속하게 통장까지 없앴을 것"이라고 했다.
국내 전문가들은 회사 주소나 임원 이름 등을 토대로 '대포통장 공장'으로 의심되는 유령 회사를 선별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봤다. 오랜 기간 행정부(국세청)와 사법부(법원)가 관리를 나눠 맡은 상황에서, 바로 등기를 말소해 버리는 영국식 모델을 따라 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기관 간 협력을 통해 감독 기능을 하루빨리 강화하고, 이미 드러난 의심 회사부터 제재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제언이다.
실제로 1995년생인 안준호(가명) 일당은 월 1만 원을 내면 주소를 빌려주는 비상주 사무실을 이용해 유령 회사를 최소 8개 세웠다. 이들 회사 통장은 올 들어 금융감독원의 보이스피싱 명단에 60차례나 올랐다. 그런데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책임지는 기관이 없어서다.
전문가들은 유령 회사를 감시할 책임을 명확히 정하자고 제안했다. 윤해성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금처럼 국세청, 금감원으로 쪼개진 구조에선 유령 회사와 대포통장에 빠르게 대응하기 어렵다"며 "각 기관이 협력하고, 위험 회사를 감독할 책임과 권한도 명확히 부여해야 한다"고 했다.
회사와 통장을 만들 때부터 문턱을 높이자는 지적도 나온다. 일부 제2금융권에서는 서류 심사만으로 회사 통장을 발급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국무총리실 산하 정부 합동 부패예방감시단 총괄국장을 지낸 김우석 법무법인 명진 대표변호사는 "은행이 FIU에 의심 거래를 보고하듯, 의심스러운 회사 통장 개설 시도를 보고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며 "통장을 만드는 사람에게 '허위로 만들면 처벌받는다'는 점을 분명히 알리도록 의무화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